2014년 3월 1일 토요일

전쟁지도의 중요성-호치키스의 지도

보통 호치키스(Hotchkiss)라고 불리는 단어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면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문구용 스템플러를 떠올리게 된다. 그 다음은 호치키스 기관총 등을 떠올리게 되고 마지막으로 제드디어 호치키스(Jedediah Hotchkiss)를 떠올리게 된다.



제드디어 호치키스는 1828년 링컨 주 윈저 출생으로 버지니아의 평범한 학교 교사였지만 남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기술, 지도 제작에 일가견이 있었고, 이를 취미 생활로 즐기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학교가 문을 닫자 호치키스는 남군 소속의 버지니아 군에 참가했다. 당시 그에게 군대는 특별한 일을 맡기지 않았으나 곧 그의 재능은 빛을 발휘하게 되었다. 1862년, 돌벽(Stonewall)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잭슨 장군은 셰넌도어 계곡에서 북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남군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을만한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셰넌도어 계곡은 길이 150마일(240킬로미터)에 폭 25마일(4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지형으로 그 지형이 복잡하고 숨겨진 샛길이 많았기 때문에 지도의 중요성이 컸다. 1862년 3월 23일, 1차 컨스타운 전투에서 남군은 전략적으로 이기긴 했지만 전술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숫적으로 불리한 남군은 전술적으로 지형지물의 영향을 최대한 발휘해야 했기 때문에 지도의 필요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잭슨 장군은 호치키스에게 컨스타운 전투를 재구성할 지도를 작성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이것이 호치키스의 첫번째 임무가 되었다.

호치키스의 컨스타운 전투 재구성도
호치키스가 작성한 컨스타운 전투 재구성도

이후 호치키스는 잭슨 장군을 보좌하면서 장군이 필요로 하는 지도들을 제작하게 되었다. 호치키스 스스로가 전장을 돌아다니며 세심한 스케치를 하며 지도를 제작했고, 덕분에 남군은 북군이 가진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샛길 등을 통해 이동하며 병력의 차이를 극복하며, 기습과 도망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셰넌도어 계곡 전역의 막바지였던 크로스키즈 전투와 포트 리퍼블릭 전투에서 잭슨은 호치키스로부터 충분한 지형도를 확보해둔 상태였었고, 숫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후퇴와 측면 공격으로 북군을 격퇴하고 안정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이후 호치키스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잭슨을 따라다니며 그에게 필요한 지형도를 만들어 제공했다. 1863년 5월 챈슬러빌 전투에서 열세였던 잭슨이 과감한 측면 공격으로 북군에게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호치키스가 발견해낸 우회로 덕분이었다.


그러나 남군이 승리했던 날 밤 잭슨은 남군 경계병의 오인사격에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후에도 호치키스는 얼리 장군을 보좌하며 계속 지도를 제작했는데 1864년 2차 셰넌도어 계곡 전역에서 호치키스는 셰넌도어 계곡 전체에 대한 지도를 작성하게 된다. 인치 당 6666.67피트 스케일의 이 지도는 길이 8.25피트, 폭 3.5피트의 거대한 지도로 이 지도를 통해 남군은 셰넌도어 전역에서 워싱턴 D.C의 외곽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얼리가 시더 크리크 전투에서 패한 후 호치키스는 수백장에 이르는 자신이 제작한 지도를 가지고 남북전쟁의 최후의 접전이 벌어지는 피터스버그로 들어가 리 장군 휘하에서 싸우게 되었다. 리가 그랜트에게 항복하면서 남군 소속이었던 호치키스도 포로가 되었고, 그가 제작한 지도들도 모두 압류되었다. 얼마 후 그랜트는 호치키스를 석방하면서 그의 지도들을 반환했다. 대신에 일부 지도들은 연방 정부에 귀속되어 전쟁성에서 버지니아 주에서의 전투들을 재구성하는 지도들의 자료로서 쓰이게 되었다.

석방 후 호치키스는 버지니아로 귀향했고, 전후 저술 활동으로 그가 참전했던 여러 전투들에 대한 지도들을 남겼다.

참고 및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Jedediah_Hotchkiss
http://confederateengineers.org/jedhotchkiss.html
<<지도박물관>>, 존 클라크 저, 김성은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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