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3일 일요일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도와 관련된 첩보전

한국사 자체에는 지도와 관련된 첩보전 이야기가 별로 나오지가 않는다. 그나마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것이라 생각되는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류왕 11년(628년) 기록이다. 그보다 앞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지도 기록은 다음과 같다.

11년(서기 628)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封域圖, 지도)를 올렸다.
十一年 秋九月 遣使入唐 賀太宗擒突厥頡利可汗 兼上封域圖
[네이버 지식백과] 영류왕 [榮留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8.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여기서의 봉역도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확인이 불분명하다. 지도는 확실하나 아마도 국토가 대강 그려져 있는 소축척지도일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걸로는 정확한 지형 지물 등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니 실제 전쟁에서 활용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당나라는 고구려 주요 지역에 대한 지리를 파악할 방법을 찾기로 한다. 이에 근거할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 영류왕 24년 기록에 나타난다.



24년(서기 641), 당나라의 임금이 우리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왔다. 대덕이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므로,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여,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중국인으로서 수나라의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었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임금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나라의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였다.(후략)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因奉使覘國虛實 吾人不知 大德還奏 帝悅 (후략)

[네이버 지식백과] 영류왕 [榮留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8.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직방낭중 진대덕이 첩자 노릇을 하러 사자로 온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진대덕의 직위인 직방낭중에 있다. 주례에 보면 직방낭중은 직방을 관리하는 관리로 직방은 6경 중 하나로 군사를 담당하는 하관에 속하며, 국내의 지도를 모아두는 관청이었다. 요즘 말로 말해서 한국 국방부 지형정보단장이 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가는 곳마다 관광하겠다면서 국경 주요 지역들의 지형지물을 눈으로 다 봤다는 뜻이었다.


결과적으로 진대덕이 눈으로 고구려 땅을 본 뒤 무엇을 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그냥 눈으로만 보는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진대덕이 무엇을 했든 그것이 1차 고당 전쟁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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